363년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대구약령시는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에까지 한약재를 공급해온 세계적인 한약재
유통의 거점으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2001년 한국기네스위원회에서 국내 최고(最古)의 약령시로 인증을 받았습니다.
2004년에는 한방관련분야 최초로 한방특구로 지정받아 그 유ㆍ무형적 가치가 큰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약령시소개
약령시는 1658년(효종 9년) 무렵 한약재 수집의 효율성을 위한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1년에 두번(봄과 가을 1개월씩) 대구성 북문 근처의 객사 뜰에 개설되었다가 1908년 일제에 의해 대구성벽이 철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과 연락의 거점이 되어 지속적인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41년 약령시가 폐쇄되고, 광복 후 약령시가 재개하였으나 1950년한국전쟁으로 다시 폐지되었다. 6.25 전쟁 이후 변모된 모습으로 형성된 한약재 상설시장이 현재의 남성로 일대 약전골목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약령시는 남성로와 동성로3가, 계산1ㆍ2가, 수동, 종로2가, 장관동, 상서동 일부를 포함하는 전장 715m의 도로변을 따라 많은 상가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그중 한약관계 점포(약70%∼80%)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말한다.
1988년 8월 1일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로 부터 전통한약시장으로 지정될 당시의 면적은 324필지 3654.9㎡이지만 관련 업소의 증가로 차츰 권역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대구약령시는 중앙대로와 달구벌대로를 가로지르는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운행 중인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도보로 2∼3분 이내에 위치하고 있어 대중 교통수단을 통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약령시의 발생에 관한 제설
대구 약령시의 형성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특히 대구 약령시의 형성과 관련하여대시(大市)설, 중국 조공설, 일본 수출설, 대동법 실시설과 자연발생설 등의 다섯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대구 약령시의 발생동기가 약재의 효과적인 채집을 위해 중앙과 지방정부의 계획과 지원 하에 국가의 정책적인 필요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대시설은 생산자와 중개상 간의 유통을 원할하게 하는 도매시장으로서의 대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설이다.
둘째, 경상도 지방에서 풍부하게 산출되는 약재도 조공품의 하나로 제공되었다는 중국 조공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약재를 효율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개설되었다는 설이다.
셋째, 일본의 조선약재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수출용 약재의 효율적인 수집을 위해 대구 약령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일본 수출설은 1943년에 출간된 "大邱府史"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외에도 공인들로 하여금 현물대신 특산물을 대납하게 한 대동법 실시설과 교통 및 우수한 약재들이 자생하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자연발생적으로 약령시가 생성되었다는 자연발생설이 있다.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볼 때 대구 약령시는 국가차원 뿐만 아니라 지역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